약대, 시우물 사람들도 일당벌이를 해

 

 부천지역, 경인고속도로 건설 역사

약대, 시우물 사람들도 일당벌이를 해

 

한도훈(시인, 부천향토역사 전문가)

hansan21@naver.com

 

● 경인고속도로 뜻

부천의 서북쪽에 동서로 관통(貫通)하는 도로가 있다. 부천의 아래 허리를 동강내버린 도로. 예전 오정구를 반토막낸 도로. 단 일초도 쉬지 않고 소음과 진동으로 가득 채우는 도로. 아침저녁으로 극심한 정체를 빚으면서도 꼭 그 길로 가야만하는 곳.... 경인고속도로이다. 고속도로이기 때문에 속도 제한이 100km를 넘나든다. 도로 중간에 신호등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인천항에서 영등포까지 연결된 도로이다. 이때 ‘영인고속도로’라고 명칭을 정해야 하는데, 경인고속도로이다. 경성에서 인천항까지라는 얘기다.

경성(京城)은 한양, 서울의 옛이름이다. 1910년 10월 1일 시행된 조선총독부 지방관관제에 따라 한성부는 경성부(京城府)로 개칭되고, 경기도에 편입되었다. 이후 한성부는 지워지고 36년 동안 경성으로 사용하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우리말 '서울'을 쓰기 시작했다. 경인고속도로가 건설되던 시기가 1960년대 말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제 잔재인 경성이 쓰여지고 있다는 얘기이다. 이 외에도 한자 서울 경(京)만 따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추론이 합리적이지 않다. 한 글자인 경(京)만 쓰지는 않기 때문이다.

경성이라 하면 사대문이라 불리는 한양산성 안을 가리켜온 이름이다. 경인고속도로가 남대문까지 연결되어야 하는데 영등포를 지나 여의도까지이다. 경인고속도로가 개통되기전 지도에 보면 도로 계획도가 서울 당산동까지 그려져 있다.

 

▲ 곰달내고개 구간

● 봉배산을 싹뚝 잘라

하나의 도로를 내려면 그만큼 산이 잘리고, 들판을 메워야 한다. 부천도 마찬가지이다. 경인고속도로가 1968년도에 완공되었는데, 이를 위해서 부천의 산들이 조금씩 잘려 나갔다.

경인고속도로 부천 구간은 고리울에서 시우물까지이다. 고리울에선 곰달내고개를 잘랐다. 곰달내고개는 조선시대 때에 세 갈래로 갈라지는 갈림길이었다.

한 갈래는 영등포로 가는 가는 길이고, 다른 한 길은 부평도호부가 있는 계양으로 가는 길이었다. 마지막 하나는 인천도호부가 있는 문학동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래서 곰달내고개는 삼거리.

이 곰달내고개에는 서낭당도 있어서 고리울 사람들이 매년 도당제를 지내기도 했다. 곰달내고개가 삼거리여서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곤 하던 길이었다. 부평도호부, 인천도호부에서 한양으로 길 떠나는 사람들로 인해 들 붐비던 곳이었다.

 

▲ 봉배산 구름다리

 

곰달내고개에서 서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봉배산이 나온다. 봉배산 산허리를 잘라내며 경인고속도로가 관통했다. 봉배산에는 청동기 시대 움집들이 발굴된 곳이다. 봉배산 꼭대기에는 소도(蘇塗)의 원형으로 평가받는 적석환구유구(蹟積石環溝遺構)가 있다. 움집도 무려 21채나 발굴되었다. 경인고속도로 바로 곁에도 움집이 있다. 경인고속도로로 잘린 부분에 얼마나 움집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블도저식으로 고속도로를 밀어부친 박정희식 개발이기에 유물조사나 지표조사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당시 지표조사를 했더라면 더 많은 움집들이 발굴 되었을 것이고, 더 많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을 것이다.

봉배산에서 뻗어나온 골짜기인 식골(植谷)이 있다. 이 골짜기 대부분이 경인고속도로로 편입되어 버렸다. 식골 위쪽엔 밭들이 많았다. 그래서 고리울 사람들이 이곳에서 농사를 지었다. 이때 밭에서 반달돌칼 같은 것들이 많이 굴러 다녔다고 했다. 아이들이 그걸 가지고 소꿉놀이용으로 쓰다가 뒤곁에 버려진 뒤 무관심 속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여기저기서 청동기 시대 유물들이 굴러다녔는데 먹고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오랫동안 신고조차 되지 않았다.

고리울 청동기유적이 알려지게 된 것은 1995년 여름 홍수로 반달돌칼과 돌창 드러났다. 이를 한 등산객이 주워 부천시청에 알린데서 시작되었다. 그 뒤 7차례의 지표 조사를 통해 적석환구유구 등 천신제 제사터, 움집 등이 대거 발굴되어 수도권에서 가장 규모가 큰 집단주거지임이 확인 되었다.

 

▲ 향토유적숲길 구름다리

● 향토유적숲길을 이어주는 구름다리

봉배산을 바로 지나자 만난 곳이 봉배산 중턱과 꼭대기를 연결해주는 다리이다. 이 다리를 통해 부천의 둘레길 중에서 제1코스인 향토유적숲길이 연결된다. 원래는 경인고속도로로 남북으로 양분된 공원을 생태계 다리를 놓기로 계획되었다. 그 다리를 통해 주민 통행은 물론 다람쥐 등 동물이 오갈 수 있도록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생태계 다리는 취소되고 사람들이 오가는 구름다리로 변경되었다. 생태계 다리가 만들어졌다면 그나마 봉배산이 서로 이어지는 모양꼴을 다시 갖추었을텐데, 아쉽다.

향토유적숲길은 고리울 청동기 유적 시작점에서 시작해서 소사역까지 연결된다. 봉배산, 범바위산을 지나고 경숙옹주묘, 수렁고개, 지골에 있는 부천무릉도원 수목원을 지난다. 그리하여 멀미인 원미산 정상을 건너 멀미봉을 지난 뒤 소사역에 도달한다.

봉배산 아래 굴다리이다. 벌응절리에서 까치울을 거쳐 고리울로 갈 때 지나는 굴다리이다. 경인고속도로가 세워지기 전에는 조그만 소로(小路)였다. 이 소로 옆이 사루지이다. 사루지 꼭대기인 사루지 서낭당이 있었다. 고리울 마을 분들이 이 사루지 서낭당에서 당고사를 지냈다.

다음은 은데미이다. 범바위산 서늠이골에서 시작한 고리울내 개울물이 봉천이골을 지나고 은데미공원을 지난다. 그 은데미 공원 바로 아래에 굴다리가 연결되어 있다. 도로로 복개되기 전에는 풍부한 개울물이 흐르던 곳이었다. 서북쪽에는 불근들리라는 곳이다. 이곳에는 붉은 황토밭들이 많아 이곳에 물을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은데미 산줄기하고 멧마루 계산의 산줄기가 맞닿아 있었다. 이 사이를 관통해서 경인고속도로가 건설되었다. 계산이 반토막 났다. 계산 아래에는 쇄기라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 바로 옆에 도로가 뚫린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깊은구지에서 벌막을 거쳐 겉저리, 당아래, 구렁목고개를 거치고 점말을 지난 다음 멧마루로 향해 가던 신작로 길이었다. 지금도 이 도로는 서울로 가는 길목으로 유용하다. 원종교 사거리로 명명되어 있다.

 

▲ 경인고속도로 베르내 통과 구간

● 베르내를 통과한 경인고속도로

그 아래에는 베르내가 통과했다. 쇄기 마을 앞으로 흐르던 베르내를 막아 쇄기보가 있었다. 보를 막아 농사를 짓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베르내는 복개되어 아래로 흐르고 위로는 경인고속도로가 지나간다. 굴다리 근방을 베리내 사거리라고 부른다. 베르내를 베리내라고 부르기도 했기에 가능하다. 하지만 베르내로 통일해서 불렀으면 한다. 경인고속도로 옆으로 수도로라고 명명해 놓았는데, 이곳은 수도길이 아니다. 잘못된 작명이다.

이 길을 지나면 능미 산언덕이 이어진다. 수도로 중간에 일제강점기 때 신사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래서 신사터로 부른다. 당시 오정면 사람들에게 일본신사에 들러 일왕을 향해 절을 하도록 강요한 처절한 역사가 숨쉬고 있다.

능미 꼭대기에서 경인고속도로를 가로질러 다리가 놓여져 오정동으로 가도록 만들어 놓았다. 이 다리를 도당교라고 한다. 그 사거리를 도당교사거리로 부른다.

그 사거리에 아래로 오면 진짜 수로길이 잘려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북쪽으로는 성오로 127번길로 명명이 되었고, 남쪽으로는 수도로로 명명되었다. 이걸로 수도길이 경인고속도로로 인해 남북으로 잘렸음이 증명된다.

소도길에서 조금 내려오면 내촌고가길을 만난다. 내촌에서 오정 마을로 가는 지름길로 다리를 만들었다.

내촌고가길 아래에 굴다리가 있다. 옛김포선이라는 산업철도가 소사역에서 약대, 시우물을 거쳐 김포공항을 오갈 때 만들어진 도로이다. 경인고속도로가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굴다리가 생겨난 것이다.

 

▲ 압구지 부천톨게이트

● 부천 톨게이트

부천 톨게이트를 통해 경인고속도로로 진입한다. 부천 톨게이트가 있는 곳이 압구지이다. 조선시대 말까지 이 압구지로 배가 들락거렸다. 시우물 어르신이 선조로 들었다며 증언해준 내용이다.

압구지는 매봉재 우산방죽골에서 흘러내린 붕어내, 매봉재 개롱지에서 흘러내린 붕어내 지류가 만나서 제법 큰 개울을 이루고 있다. 지금은 예전에 비해 좀 더 서쪽에서 두 개울이 만난다. 두 개울 사이에 붕어마루라는 조그만 산이 있었다. 지금은 내촌공단이 붕어마를 온통 허물어 보리고 차지하고 있다. 이 붕어마루가 들판 앞쪽으로 툭 튀어 나와 있었다. 이를 가리켜 압구지라고 한다. 압은 ‘앞’이다. ‘구지’는 곶으로 튀어나왔는 것을 뜻한다.

두 개울이 만났기에 이 압구지 앞쪽에 큰 웅덩이가 있었다. 그 압구지 조금 동쪽에 부천톨게이트가 만들어진 것이다.

1969년도 12월에 국립건설연구소에서 발행한 지도에는 부천톨게이트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후 지도에 부천톨게이트가 그려진 것을 보면 부천 지역에 삼정공단, 내동공단, 도당공단, 춘의공단 건설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부천으로 들락거리는 차량들이 많아진 것이다. 덕분에 톨게이트가 생겨났다.

 

▲ 동부간선수로가 통과하는 굴다리

● 톨게이트 아래쪽 동부간선수로 관통

톨게이트에서 인천쪽으로 가는 길목에 동부간선수로가 있다. 경인고속도로 아래로는 수로가 흘렀다. 경인고속도로가 건설된 시기에는 중동들판에 물을 대주던 수로가 가동되었다. 경인고속도로 옆이 한국화장품 공장이었다. 그 공장 입구 옆에 양수시설이 있어 약대, 중동으로 물을 펌프해 공급하던 곳이었다.

지금은 동부간선수로는 메워져 도로로 이용되고 있다. 이 수로를 메운지는 별반 오래 되지 않았다. 한국화장품이 이전을 하고 그 자리에 부천테크노파크 쌍용3차가 건설되었다. 아파트형 공장으로 변모를 한 것이다. 북쪽에는 된벌이 있어 농사를 짓던 곳이고, 부천농협 정미소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물론 그곳에 시우물 마을 입구에 세워진 장승이 있었다. 그래서 장승백이라는 지명이 탄생하기도 했다.

서울외곽순환도로에서 부천으로 들어오는 진입로를 지나면 굴포천 위로 펼쳐진다. 굴포천을 지나면 서운 IC가 있다. 이를 통해 서울외곽순환도로에서 경인고속도로로 진입이 가능하다.

이렇게 경인고속도로가 건설되면서 부천에 삼정공단, 내동공단, 도당공단, 춘의공단이 순식간에 세워졌다. 이곳 공단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필요해서 전라도, 충청도 사람들이 대거 이주해 왔다. 이들이 먹고 살 집이 필요해서 약대, 도당, 시우물, 멧마루, 고리울 등이 구도심으로 자리를 잡았다.

일찍 부천에 정착한 사람들은 경인고속도로가 건설되는 시기에 공사판에 나가 일당을 벌기도 했다. 아침이면 약대, 시우물 사람들을 트럭에 실어 날라 도로 공사장에 풀어놓았다. 그러면 소쿠리에 자갈 등을 담아 길에 뿌리는 일을 했다. 이렇게 흙이며 자갈 등을 고르게 뿌려 단단하게 다진 후 아스팔트를 깔았다. 이게 경인고속도로 건설 역사이다. 

 

▲ 장승백이로 넘어가는 굴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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