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에서 인천도호부로 갔던 겉저리 앞 옛길

 

▲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1871년)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그려진

한양에서 인천도호부로 갔던 겉저리 앞 옛길

 

한도훈(시인, 부천향토역사 전문가)

hansan21@naver.com

 

◆ 겉저리를 지나는 길주로(吉州路) 내력

겉저리, 당하리 마을 앞을 통과하는 길은 현재 길주로(吉州路)이다. 이 도로는 인천광역시 서구 석남동에서 출발해서 부천시 춘의동 작동터널까지 이어진다. 서구 석남동에선 삼거리로 출발하지만 서울에선 신정로로 이름이 바뀐다.

길주는 고려 충렬왕 때 당시 부천이 포함된 부평을 지칭하는 이름이었다. 길주로는 고려 충렬왕의 은혜를 입어 탄생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충렬왕이 당시 계양도호부를 길주목으로 승격시킨 사연이 아주 흥미롭다.

충렬왕 때 신하 이습(李褶)이 있었다. 이습은 고종의 후궁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 사위가 되었다. 자신이 왕족과 국혼한 자라 칭하면서 간신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고려 왕실 사위였기에 고종을 비롯해서 다음 왕인 원종의 총애를 받았다. 원종 때는 상서도성의 종3품 벼슬인 상서우승(尙書右承)이 되었다.

상서도성은 육조(六曹)를 관장하던 관청이었다. 형식상 중서성(中書省)·문하성(文下省)과 함께 삼성(三省)으로 불리던 국가의 최고 의정기관이었다. 상서도성의 최고관직인 상서령(上書令)은 종친에게 주는 명예직이었다. 이습은 그 아래 상서우승의 벼슬을 역임했다. 상서도성 상서령 아래에는 상서좌승도 있었다.

충렬왕(忠烈王) 때에는 지감찰사사(知監察司事) 상장군을 역임했다. 이 직책은 고려 시대 시정(時政)을 논하고 풍속을 교정하며 백관에 대한 규찰과 탄핵을 담당했던 어사대의 관직이다. 최고의 실권을 갖고 있던 실세 중의 실세라고 볼 수 있다. 공민왕 5년(1356)에는 고려 전기 관제를 복구하면서 지어사대사로 고쳤다.

고려 충렬왕은 사냥을 몹시도 좋아했다. 활로 사냥하는 것을 즐겨한 것이 아니라 매를 날려 꿩이나 사슴, 토끼 같은 짐승을 낚아채는 매사냥을 즐겼다. 당시 매사냥은 전국에서 인기있는 스포츠 같은 것이기도 했다.

당시에 수도였던 송도 한복판에 매방이 있었다. 그런데 수시로 매들이 날아들어 민가의 닭과 개를 함부로 잡아 죽였다. 이런 일로 송도 주민들로부터 큰 비난을 받았다. 이에 이습은 부하 박향(朴鄕)을 시켜 매방을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지시했다. 여러 곳의 후보지를 탐색한 결과 계양도호부(桂陽都護府) 관할인 경명현(景明峴) 부근이 적지라고 보고했다. 경명현은 계양산과 중구봉 사이에 있다. 이곳에 응방(鷹坊)을 설치하고 매를 징발했다. 그래서 이 고개가 징맹이고개로 바뀌었다. 이습은 사육도가(飼育都家) 윤수(尹秀)로 하여금 매들을 사육하게 했다.

충렬왕은 여러 번 계양도호부(桂陽都護府)인 경명현 응방에 다녀갔다. 이곳에 올 때마다 매사냥을 즐기었다. 한 번은 원나라 사신 다루가치인 달로화치(達魯花赤)와 더불어 많은 수행원을 대동하고 와 계양도호부 여기저기에서 매사냥을 하며 즐겼다. 당시 계양도호부에서 관할한 땅은 한강의 지류인 굴포천이 흐르는 분지로 갈대가 무성하게 자란 넓은 습지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 갈대밭 사이로 많은 짐승들이 모여 들었다. 최적의 매사냥터가 아닐 수 없었다.

이습은 왕을 즐겁게 해주려고 미리 윤수를 시켜 고니와 따오기 등의 새들을 잡아서는 배와 등의 털을 뽑아서 날렸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매를 날려 이를 잡아왔다. 미리 털을 뽑았으니 잘 날지도 못해 매에게는 독안에 든 쥐나 마찬가지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충렬왕은 이를 보고 매우 기뻐했다. 당연히 다루가치인 달로화치(達魯花赤)도 즐거워했다. 몽고 사신을 극진히 대접한 것이다. 이에 충렬왕은 매사냥에 귀신같은 솜씨를 발휘한 이습을 총애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충렬왕은 행복한 매사냥을 하면서 즐겨 찾은 계양도호부(桂陽都護府)에 선물을 안겨주었다. 일약 길주목(吉州牧)으로 승격시킨 것이다. 한단계가 높은 고장이 된 것. ‘길한 땅’이라는 의미까지 부여했다. 얼마나 충렬왕이 매사냥을 좋아했는지 자기가 죽으면 길주목에 장사 지내달라는 유언까지 했다.

하지만 충렬왕 아들인 충선왕은 1310년에 길주목을 부평부(富平府)로 강등시켜 버렸다. 아마도 충선왕은 매사냥만 즐겨한 아버지를 몹시도 미워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 겉저리 앞으로 연결된 옛길, 구렁목고개길

◆ 길주로 대신 옥산로는 어떤가.

이 길주로 지하로는 서울지하철 7호선이 달리고 있다. 그러니까 땅위, 땅속으로 자동차, 전철이 달리는 이중으로 된 도로라고 할 수 있다. 이 길주로에서 겉저리엔 춘의역, 당하리 주변엔 부천종합운동장역이 들어서 있다.

길주로가 들어서기 전에는 계남큰길이었다. 2007년 2월 7일 개통되었다. 계남(桂南)은 계양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계남초등학교, 계남중학교, 계남고등학교, 계남공원이 그 이름을 얻고 있다. 계남로가 있는데 이들 학교 앞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엉뚱하게 부천교육지원청 앞으로 연결되어 있다. 부천교육지원청 옆에는 아이러니 하게도 길주공원이 있다. 반면에 계남공원은 길주로 사거리 옆에 있다. 이렇게 길주로, 계남큰길이 번갈아 사용하면서 부천의 도로이름, 공원이름, 학교이름 등은 질서정연하지 못하고 뒤죽박죽 혼재되어 버렸다.

부천 고유의 땅이름으로 작명하지 못하고 인천의 영향이 땅이름에 거세게 불어 그대로 수용한 탓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강점기 계남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시대에는 ‘표절리, 당하리’는 옥산면(玉山面)에 속하기 때문에 당연히 옥산큰길이나 옥산로 되었어야 함에도 계남큰길, 길주로로 명명되어 버렸다.

이로 인해 부천의 고유한 특성인 옥산면은 사라지고 인천의 일부분처럼 읽혀지는 잘못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서울에서 길주로를 받지 않은 것은 서울만의 자존심이 작동되었다고 본다. 부천에선 인천에서 작명한 것을 그대로 받을 수밖에 없었던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 그것은 당시 작명에 참여했던 인사들만이 아는 비밀 아닌 비밀일 것이다.

 

▲ 1962년 1월 1일 촬영한 겉저리 초가 모습

◆ 조선시대 겉저리를 지난 옛길 모습

고산자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1860년경)를 보면 당하리, 겉저리인 표절리로 지나는 소로(小路)가 그려져 있다.

당시에 소로(小路)라고 해 보았자 봇짐장수들이 지나가거나 말 탄 사람들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아주 좁은 길이었다. 소로(小路) 그 자체였다. 말이 끄는 마차 같은 것을 많이 사용하지 않았기에 조선시대 길은 그다지 크게 닦지 않았다. 이 길도 큰 비가 내리거나 하면 유실되기 일쑤였다. 그러니까 길이 생겨났다 사라지기 일쑤였다는 것이다. 겨울이나 봄에 사람들이 발을 딛고 다니면 길이 생겼다가 여름 장마철이 지나면 감쪽같이 사라지는 그런 길이었다. 논둑이나 밭둑길로 사용되다가 큰길로 변모하기도 했다. 논밭이 구불구불한 형태이듯이 이 길 또한 자연 그대로인 꼬부랑길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길이 없는 것이 국가 안전을 담보하는 것’이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청나라나 일본 왜놈들이 침략을 할 때 길을 통해 물밀 듯이 밀려왔기에 이러한 사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기에 백성들도 길을 내지 않았고, 주로 수로(水路)를 통해 목재를 실어나르거나 곡식들을 실어나르곤 했다. 육로(陸路) 보다 수로(水路)를 더 선호한 시대였다.

1983년 조선을 방문한 미국인 퍼시벌 로웰은 지방도로를 보고 “조선의 도로는 도로라는 이름이 과분할 정도로 빈약하다. 그저 오가는 사람들의 발자국에 따라 만들어진 원초적인 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계획적으로 길을 닦은 것이 아니라 어쩌다 생겨났다고 말하는 편이 옳다. 자연적으로 생긴 이래 한 번도 인위적인 보수를 거치지 않은 듯 하다”라고 적었다.

1984년부터 1987년까지 조선을 여행했던 영국 여인 비숍은 조선의 도로에 대해 “처음 조선에 온 서양인들은 수레 하나 다닐 수 없는 좁은 도로의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도로는 좁을 뿐만 아니라 온통 돌 투성이에 움푹 파이고 절척한 곳 투성이라 여행하기에는 몹시도 불편했다. 어떤 곳에서는 날씨가 좋은 날에도 진창길로 무릎까지 빠질 정도였다”라고 썼다.

비숍과 비슷한 시기에 조선을 방문한 카르네프 러시아 장교는 “조선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이 도로 사정이다. 모든 길들은 대단히 좁고 구불구불하여 더러웠다. 그와 동시에 모든 땅들은 농지로 개간되어 있어서 조선 땅에서 첫발을 내디뎌 서울까지 가는 동안 모든 길들은 전답 사이로 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예외적이었던 곳은 험준한 산길을 가야하는데, 수십킬로의 길이 전부였다”고 지적했다.

카르네프 러시아 장교가 조선을 찾은 시기는 경인철도가 부설되기 전이다. 그래서 열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제물포항에서 한양까지 가야 했다. 그때 카르네프는 당연하게 부천을 가로 질러 길을 걸었다. 이로 미루어 당시 부천의 도로 사정을 정확하게 유추해 볼 수 있다. 당시 부천의 도로는 그저 논밭 둑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것도 너무 질척거려서 사람이 다니기에 불편했다.

부천 전지역에서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니다. 일제 강점기, 해방 이후까지도 이같은 도로 사정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는 얘기다.

 

▲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1871년)

◆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그려진 겉저리 소로(大路)

조선시대 대로(大路)는 사대문안 육조거리가 유일했다. 그 크기가 56척인 16.8미터였다. 그 다음은 중로(中路)로 16척인 4.8미터였다. 이 중로도 사대문안에 있었다. 마지막 소로는 11척에 3.3미터였다.

1770년 발간된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의 ‘도로고’에 조선 전국의 도로망으로 여섯 개의 대로로 분류해 놓았다. 여섯 개 대로의 출발점은 모두 경도(京都)였다. 그런데 이 대로가 사대문안 대로하고는 달라서 소로 수준이었다. 우마차는커녕 겨우 사람들이 걸어다닐 수 있는 수준에 불과했다.

조선의 6대로는 서울과 서북・동북・동・동남・서남・서쪽 방향의 극지를 방사선으로 연결한다.

제1로는 ‘경성서북저 의주로 제일’(京城西 北抵義州路 第一)으로 개성과 평양을 지나 평안도 의주까지이다.

제2로는 ‘경성동북저 경흥로 제이’(京城東北抵 慶興路 第二)으로 누원, 회양, 철령, 함흥을 지나 함경도 경흥 서수라까지이다.

제3로는 ‘경성동저 평해로 제삼’(京城東抵 平海路 第三)으로 양근, 지평, 원주, 강릉을 지나 강원도 평해까지이다.

제4로는 ‘경성동남저 동래로 제사’(京城東南抵 東萊路 第四)으로 용인, 충주, 상주, 대구를 지나 경상도 동래까지이다.

제5로는 ‘경성서남저 제주로 제오’(京城西南抵 濟州路 第五)으로 과천, 수원, 공주, 전주, 해남, 이후 해로로 제주까지이다.

제6로는 ‘경성서저 강화로 제육’(京城西抵 江華路 第六)으로 양화진, 양천, 김포를 지나 강화까지이다. 의주로로부터 강화로까지 시계방향으로 제1로부터 제6로까지의 번호가 붙었다.

 

대동여지도에 보면 한양 도성에서 출발한 이 길은 양화진을 거쳐 남산을 지난다. 양화진은 제6로인 강화대로에 속했다. 인천도호부로 가는 길은 여기에서 갈라진 지선이었다.

부천경내인 곰달내고개를 지난다. 곰달내고개는 부평도호부로 가는 길, 인천도호부로 가는 길로 나뉘는 분기점이었다. 한마디로 삼거리였다.

곰달내에서 고리울 마을, 은데미 마을, 점말, 성골 마을을 지난다. 구렁목고개인 구룡목고개를 넘으면 바로 당하리 마을이다.

매봉재 동쪽 봉우리인 춘지봉 산자락을 밟아 겉저리 마을 앞을 지난 다음 벌말로 건너간다. 돌내에 있는 홍천교를 건넌 다음 진말을 거쳐 깊은구지 아래를 밟아 산골말 앞으로 나아간다.

그 다음 비루고개인 성현(星峴)을 넘었다. 이 비루고개에서 인천도호부로 가는 길과 제물진으로 가는 길로 나뉘었다. 곰달내고개처럼 삼거리였다. 곰달내고개에서 인천도호부까지 40리, 곰달내고개에서 제물진까지는 50리 거리였다.

고산자 김정호의 동여도(1860년경)에도 대동여지도와 똑같이 이 대로가 그려져 있다.

나머지 고지도인 해동지도(1750년~51년), 여지도서 부평부지도(1760년경), 경기지의 부평지도(1842년~43년), 경기읍지의부평지도(1871년), 기전읍지의 부평부지도(1871년), 경기읍지의 부평부지도(1872년), 기전읍지의 부평지도(1894년~95년) 등에는 이 소로(小路)가 그려져 있지 않다.

결론으로 고산자 김정호가 대동여지도에서 상세하게 길을 그려넣은 것에 주목한다. 당시에 길 같지 않은 길이었지만 이를 꼼꼼하게 찾아 십리 마다 표시해 넣은 것은 고산자가 국토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보여주는 최고의 증거이다.

 

▲ 조선말 옹기장수들이 걸어야 했던 옛길-잭 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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