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말 신작로에서 시작해서

▲ 1939년 소신여객 차부 사진(부천시 제공)

 

조선말 신작로에서 시작해서

부천의 최초의 버스 소신여객자동차부까지

한도훈(시인, 부천향토역사 전문가)

 

◆ 신작로(新作路)의 의미(?)

 

겉저리 앞, 당하리 앞, 점말 앞, 성골 앞, 은데미 앞 도로를 가리켜 마을 사람들은 일제 강점기에 새롭게 조성된 신작로라고 불렀다. 신작로(新作路). 새롭게 만들어진 도로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도로의 역사를 보면 조선 중기까지 엉망이었다가 조선 후기에 와서야 부랴부랴 실질적인 필요에 의해 도로를 정비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일본에 다녀와서 일본의 도로 상황을 상세하게 살펴 본 김옥균(金玉均)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시작되었다. 김옥균은 1882년 일본을 다녀와서 "나라의 부강은 산업개발에 있고, 산업개발은 치도(治道)가 선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치도(治道)는 관자가 주장한 그 치도가 아니다. 중앙부터 지방까지 핏줄처럼 연결된 도로를 정비해야 산업이 부강한다는 논리이다. 1884년 한성순보에 치도약론(治道略論)이라는 논설을 게재하여 도로 정비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전번에 전권대사 박영효 공과 부사 김만식 공이 일본으로 사절을 떠났을 때 나도 유람차 동경에 갔었다.

하루는 두 분께서 나를 불러 말하기를 “내가 앞으로 도로정비(道路整備)에 대해서 공부가 깊은 학자 몇 분을 초빙하여 같이 본국에 돌아가 정부에 보고하고 도로 닦는 문제를 조속히 시행하려 하는데 그대의 의사는 어떠하냐”고 물었다.

그래서 제가 “지금 우리나라는 마땅히 일대 혁신革新을 단행해야 할 때입니다. 공께서 이러한 중임重任을 띠고 외국에 전권을 행사하기 위하여 오셨으니 복명復命하는 날에는 응당 보고 들은 것을 모두 종합해서 조정에 건의하여 국가에 공훈을 세우는 것이 공에게 부하된 책임이거늘 어찌하여 도로 닦는 일만을 급선무로 삼으려 하십니까”라고 했다.

그러자 공은 웃으며 말하기를 “그렇지가 않다. 우리나라의 당면한 급선무는 농상農桑을 일으키는 데 있으며 농상을 일으키는 요체는 실로 분전(糞田)을 권장하는데 있다. 분전을 부지런히 하면 오예물(汚穢物)이 자연 없어질 것이고, 오예물이 없어지면 전염병 역시도 사그라질 것이 아닌가. 그리고 가령 농사를 잘 지었다 하더라도 수송(輸送)이 불편하면 하동(河東)의 곡식을 하내(河內)로 운반할 수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도로를 잘 닦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하겠다. 도로가 잘 정비되어 차마(車馬)를 이용하게 되면 인부 열이 하던 것을 하나가 거뜬하게 해 낼 수 있으므로 그 나머지 아홉 사람의 노동력은 공작품(工作品) 제작에 종사하게 하면, 지난날 그저 먹기만 하던 사람이 결국 일정한 직업을 얻게 될 것이다. 따라서 나라에 유익하고 백성에게 편리한 것이 이보다 나을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라고 번문하기에, 나는 일어나서 공에게 절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참으로 옳은 말씀이다. 공께서 말씀하신 위생 . 농상 . 도로는 고금 천하에 바꿀 수 없는 정법(正法)이다. 내가 본국에 있을 때 친구들과 이런 일을 이야기 해 보았으나 이같이 말 한 마디가 종합적이고 치밀한 것을 듣지 못했다. 나는 또 듣건대 일본이 명치유신(明治維新) 이후 모든 분야를 혁신하는데 있어서 도로 정비에서 거둔 효과가 가장 크다고 한다. 이제 공이 귀국하여 이 문제를 실시하게 되면 지난날 조소하던 외국인들이 장차는 축하하는 손님으로 바꿔질 것이므로 우리나라가 부강(富强)하게 되는 기틀이 바로 이 도로를 잘 정비(整備)하는 데서 시작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옥균 치도약론 중에서(표현 약간 수정)

 이렇게 도로에 대한 문제 제기가 확산되자 1896년에는 법규유편(法規類編)이라는 도로규정이 내무부령으로 공표되었다. 이로 인해 조선시대 후기 도로에 대한 법제가 이루어졌다.

경국대전의 공전(工典)편에 도로·교량·도량형·산업 등에 대한 규정을 실어 놓았지만 현실에선 유명무실(有名無實)했다. 이렇게 유명무실해진 도로규정을 정리해 새로운 법규에 실은 것이다. 그렇지만 이 도로규정도 서울에 있는 종로상가 등 중심상가 등의 무질서한 상태를 규제하려는 소극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지방까지 이 법령이 적용되지 않아 부천의 경우에는 여전히 소로(小路)로 다닐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 흘러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해 간접 통치를 하던 1906년에는 다시 경찰청령으로 가로관리규칙(街路管理規則)을 발표했다. 이 역시 도시 도로에 한하여 적용 되는 것으로 전국적인 전국 도로체계를 전제로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때 7개년 도로개수 계획을 수립하여 시행하기 시작했다. 이 계획에 따라 전국에 조금씩 도로가 정비되고 새롭게 도로가 개설되기 시작했다. 겨우 사람이 다니던 길에서 우마차 같은 교통수단이 다닐 수 있게 된 것이다. 일제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보여지는 대목이 있지만 조선정부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때 신설되거나 기존의 도로를 넓혀 만든 도로를 '신작로(新作路)'라 했다. 이 신작로라는 용어가 처음 민중들에게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부천을 비롯해서 전국적으로 도로가 새롭게 정비되면서 사람들은 일제에 의해 신작로가 개설되기 시작했다고 믿게 되었다.

◆ 일제강점기 때 신작로

조선말 개항 후 일제에 의해 1899년에 경인선(京仁線) 철도가 개통되었다. 제물포와 노량진 사이에 교통이 획기적으로 좋아진 것이다. 처음에는 화물만 수송했지만 점차 승객 수송도 늘려갔다. 노량진에서 한양의 이천 마을로 연결된 한강철교가 1897년 3월에 착공하여 1900년 7월에 준공되었다. 이 한강철교로 인해 확실한 경인선이 되었다.

경인선 중에서 소새에서 범박 바우백이를 올라갈 때는 증기기관차가 통통거리고 헐떡거려 천천히 올라가는 틈에 싣고 가던 석탄 같은 것을 재빨리 내려쓰곤 했다.

1905년에는 경부선(京釜線)이 개통되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철도가 놓여지고 승객들이 오갈 수 있게 천지가 개벽된 것이다. 물론 이들 철도는 철저하게 조선 민중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 열매인 수익은 일제가 완벽하게 가져갔다. 조선 정부는 이들 이익이 일제로 넘어가 는데에 그야말로 속수무책(束手無策)이었다.

그 다음 1911년 당시 조선에 자동차가 도입됨에 따라 전국의 구도로가 새롭게 변모를 시작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는 1903년에 고종 황제의 어차로 도입된 포드A이다. 이 어차는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 고종에 이어 등극한 순종이 타고 다닌 순종어차가 창덕궁에 전시되었다가 지금은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버스는 1911년에 도입된 마산과 삼천포 사이를 운행한 포드 8인승이다. 이로 인해 본격적으로 버스가 대중교통으로 시작되었다.

이렇게 자동차, 버스가 도입되면서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가 필요해진 것이다. 조선시대의 조그만 소로에선 자동차가 움직일 수조차 없어서 그걸 넓히는 작업을 전국에 걸쳐 벌어졌다. 물론 일제의 조선에 대한 실질적인 침략의 일환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경인선 철도 옆에 경인가도(京仁街道)가 새롭게 개설되었다. 이 경인가도가 경인국도로 이름을 변경했다가 현재는 경인로이다. 1918년도에 측도를 한 경성3호 지형도에 보면 경인로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현재의 경인로하고 차이가 있다면 옛소사구청 앞으로 전개된 도로이다. 소새에서 범박까지 구불하게 연결되어 있던 것을 현재는 일직선으로 곧게 뚫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경인가도의 옛모습이 보존되어 있는 것은 옛소사구청 앞 도로이다.

경부선 옆에 경부가도(京釜街道)가 개설되고. 경의선 옆에 경의가도(京義街道)도 이때 개설되었다. 1928년 말에는 1등도로가 총연장 2,818 km를 개통되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신작로라는 용어가 인구(人口)에 회자(膾炙) 시작했다. 고종이 이끈 대한제국에서 시작된 신작로(新作路)라는 용어가 일제강점기에 꽃을 피운 것이다. 그러기에 수많은 민중들은 일제에 의해 신작로라는 용어가 탄생되었다고 믿게 된 것이다.

1938년에는 조선도로령(朝鮮道路令)을 제정하여 종래의 1 ·2 ·3 등 및 등외 도로의 명칭을 없애고, 국도(國道) ·지방도 ·부도(府道) ·읍면도(邑面道)로 개칭하였다. 현재의 도로 형태와 비슷하다.

6 ·25전쟁 때에는 군사적 목적으로 많은 도로가 개수나 건설, 또는 정비되어 한국 도로 발달에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 부평에서 시우물, 오정마을, 오쇠리를 거쳐 김포공항까지 연결된 국방도로가 이를 말해준다.

▲ 1960년대 경인국도(부천시 제공)

◆ 부천 최초의 버스회사인 소신여객

경인가도에선 자동차나 트럭들이 자주 오갔다. 제물포항에서 짐을 실은 트럭들이 서울로 옮기는 역할을 담당했다. 조선시대에는 한강을 통한 수로로 실어 날랐지만 경인가도가 생기면서 전적으로 육로로 옮기게 된 것이다. 물론 철도인 경인선도 화물을 실어 나르는데 한 역할을 했다.

부천에 버스가 다니게 된 시기는 1930년대이다. 합자회사인 소신자동차부를 설립했다. 현재 소신여객 자동차 주식회사(素新旅客 自動車株式會社)가 그 전신이다. 이 소신자동차부는 10인승 2대의 차량으로 소사역전에서 소래면 신천리 간 노선을 신설하였다. 소사에서 신천리까지 운행한다고 해서 소사에서 소(素), 신천리에서 신(新)자를 따서 소신(素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시절 자동차는 목탄을 때는 목탄차였다.

이때 소사역에서 신천리까지 운행 요금은 25전이었다. 1930년대 전화가설비는 5원에서 20원 사이였다. 1930년 11월 19일자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쌀 80kg은 17월 90전, 영화입장료는 1원, 돼지고기 1근 36전, 계란 10개 40전이었다.

1935년 11월 22일자 동아일보 보도에는 마늘 1접은 60전, 고추 1근 20전, 미나리 10단은 50전 등이었다. 버스 한 번 타는데 계란 5개 정도였다. 1935년도 당시 전국에 600만 마리 닭을 키웠는데 계란 값이 아주 비쌌음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신천리까지 운행하던 버스가 승객들이 많아지면서 1935년도에 이르러 소래면 현재의 시흥시 포동인 포리까지 노선을 연장하였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전세계에서 버스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면서 엄청난 수요에 따라 18인승 미니버스 4대로 대차하여 운행하였다. 이때도 10인승 차도 운행되었다. 일제로부터 광복을 한 뒤 버스는 더 커져 32인승 버스로 바뀌었다.

소신자동차부는 현재 부천역 남부인 조흥은행 동쪽 건너편에 위치해 있었다. 조흥은행은 부천남부역에서 자유시장을 거쳐 코너를 돌면 그곳에 있었다. 현재 부천역 남부역 광장이 바로 소신여객차부가 있던 곳이다. 이곳은 1977년도에 부천역지하상가가 세워졌다. 이 지하상가가 세워지기 전에는 제일화점, 정원식품, 정육점, 복덕방 등이 있었다.

 

▲ 1939년 소신여객 차부 사진(부천시 제공)

1939년 11월 1일 촬영한 모습을 보면 당시의 모습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새해 첫날을 기념하여 소신자동차부에 근무하던 운전기사, 여차장, 종업원 등 직원들이 함께 촬영한 것이다.

사진 오른편 간판 가운데에는 한자로 소신여객자동차부(素新旅客自動車部)라고 큼직하게 새겨져 있다. 위쪽으로는 버스가 운행하는 노선도이다. 인천의 동양장(東洋場)으로 가는 노선이 있었다 그리고 소사역에서 신천(新川), 포리(捕里), 안산(安山), 반월(半月), 군포장(軍捕場)으로 가는 노선이 있었다. 소사역에서 출발한 버스가 군포에 있던 군포장까지 운행했다는 것을 표시해 주고 있다. 지금으로 치면 시외버스인 셈이다. 이 사진 속 간판 아래에는 전화번호가 27번임을 알려주고 있다.

사진 가운데는 소신여객차부 사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정 가운데에 앉아 있고, 그 양켠에 두 명이 앉아 있다. 이들 뒤에는 우리나라 70년대 중고등학교 교복 같은 복장을 착용한 직원들이 서 있다. 아마도 버스를 타고갈 때 안내를 하던 안내양으로 보인다. 그 뒤로 큰 버스 한 대, 나머지는 작은 버스가 줄지어 서 있다. 이들 버스는 현재 부천역 근방인 소사역에서 여우고개를 소새 마을을 거쳐 가야 했다. 여우고개가 제법 높아 자동차의 시동이 꺼지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승객들이 버스에서 내려 뒤에서 밀어서 밀어서 고개를 올라야 하는 힘겨운 시절도 있었다.

소신여객차부는 1954년도에 교통부로부터 그레이하운드 버스 10대를 임대하였다. 이때 동인천에서 종로2가까지 경인국도를 이용하여 운행하였다. 신천리, 안산으로 운행하다 서울로 운행의 폭을 넓힌 것이다.

1957년 한강대교 복구공사로 인해 동인천에서 노량진 구간까지만 운행하다가 1950년대 말 사세가 확장되어 차량을 여러 대 증차를 했다. 그리하여 동인천과 김포국제공항 노선을 신설하였다. 그 뒤 수원하고 안양 등지로 진출하였고 사업 면허를 발급받았다.

1958년에는 버스를 30대로 증차하여 소신여객자동차주식회사로 법인을 설립하였다. 부천 남부역을 기점으로 소래면, 오정면, 김포국제공항 등의 비포장 도로를 운행하였다.

그러니까 겉저리, 당하리, 점말, 성골, 멧마루를 거쳐간 버스는 1958년도에야 운행이 되었다. 그 전에는 소사역에 오려면 10리 길이 넘는 길을 걸어서 다녀야만 했다. 소사역, 솔안말, 소새 마을 근방에 복숭아 단지가 조성되면서 일손이 부족하자 오정면에 살던 많은 이들이 동원되었다. 하루 일이 끝나고 복숭아 낙과(落果) 같은 것들을 바구니에 이고 십리길이 넘는 길을 걸어 돌아가야 했다.

1973년 소사읍이 부천시로 승격됨에 따라 교통 수요 또한 급증하여 1989년에는 24개 노선에 275대의 버스가 운행되었다. 1990년대 중동 신도시 건설 후 19개 노선에 버스 133대가 추가 운행되었다.

 

▲ 1977년도 부천역 지하상가 건설 공사현장(부천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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