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권이 후보자의 권리라면 권리/력은 유권자의 몫이다

 
최초의 한글소설로 알려진 홍길동전은 상층부의 부패상에 대한 하층부의 호소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영웅소설로만 볼 수 없다는 측면에서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당시 상층부의 억압과 신분적 제약을 벗어나려는 뜨거운 몸부림과 혁명적 소망을 이루고자 하는 하층부의 염원과 희망을 담은 유토피아적이며 미래 전망적인 이야기이다.

개혁의 방법에는 위로부터의 변화와 아래로부터의 변화로 나눌 수 있다. 속도적인 측면에서는 위로부터의 방법이 빠르지만 감행이 어렵다. 소수인 상층부(상류)가 가진 기득권의 능동적 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하층부(대중)은 권리/한의 한계로 변화의 속도가 느리고 장애가 많아 한없이 더딜 수밖에 없다.

또 다시 숙명 같은 선거의 계절이다. 투표장에서 ‘혹시나’로 시작한 후보에 대한 간절한 기대와 가득한 호기심으로 선거가 끝나고 ‘역시나’로 마감하는 실망의 상투적 반복을 그 얼마나 경험해 왔는가. 비록 늦었지만 바뀌어야 한다는 작은 소망이다.

이제쯤은 반드시 이런 상투적 악습을 마감해야 하는 깊은 자책감과 뜨거운 의무감으로 자연이 베푸는 벅찬 신록의 계절 앞에 가슴에 스미는 아련한 흥분에 휩싸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유권자(수용자)의 입장에서 후보에 대한 검증과 관심에는 반드시 정보에 대한 한계가 있고 후보자(정보 제공자)의 입장에 대한 정황적 진실의 파악에는 현실적 장애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상황이 단절과 장벽의 가로막힘으로 폐습을 이어간다면 그것 또한 더욱 두터운 퇴보로 인한 후회는 물론 분명한 아픔으로 감당해야 할 것이다. 유권자가 생존과의 투쟁으로 무관심에 이르고 심지어 능동적 소외로 나타나 그 틈을 이용한 후보자는 결국 집권자가 되어 감당할 수 없는 횡포를 그 대가로 돌려받게 된다는 진리를 지난 선거의 역사는 소리 높게 외친다.

지민(知民)이라는 단어를 떠올려 본다. 자기가 속한 지역에서의 공적 이슈와 사회문제에 대해 공부하고 참여하는 똑똑한 시민을 일컫는다. 잘못된 후보자의 집권에 대비한 예방적 차원에서 유권자의 후보자에 대한 능동적 관심과 적극적인 관찰을 통한 입장에서 ‘수동적 바보 되기’를 멈추고 현명한 자기 권리에 대한 ‘참된 자기 찾기와 주인 되기’를 의미한다.

결국은 유권자(有權者)의 사전적 의미가 선거권을 가진 사람이라는 법률적 차원과 더불어 권력이나 권리를 가진 사람이라는 일반적 차원에서라도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대등관계 정립은 분명한 자리매김을 할 필요가 있다. 선거권이 후보자의 권리라면 권리/력은 유권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여름의 시작과 함께 해마다 다가오는 법이 정한 유권자의 날이 5월 10일이다. 아울러 근로자의 날(1일)을 시작으로 어린이, 어버이, 스승, 부부, 성년의 날이 포함된 5월은 가히 모든 것을 포용하는 바다(바다의 날은 31일)로 마감되듯이 신록의 공원에서 미래의 희망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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