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숙아, 사랑해-글 싣는 순서]
프롤로그 : 영웅 영숙이
1. 우리 영숙이는 선생님 시킬 거라...
2. “호랭이는 뭐하나? 저 간나 안 물어가고!”
3. 와야국민학교
4. 길가에 앉아서, 걸어 다니며 본 풍경들
5. 남의 집 살이
6. 진모엄마는 키가 시집가서 컸어.
7. 내 살림과 아이들
8. 이사
9. 도시생활
10. 시간 속을 걷다.


7. 내 살림과 아이들

 

 

새로 이사한 집은 방 두 칸에 좁고 허름한 부엌이 딸려있는 초가집이다. 부엌에는 찬장도 없고 휑뎅그렁한 가마솥만 붙어 있다. 나는 사과궤짝에다 보자기를 깔아, 안에는 그날 한 반찬을 넣고 위에는 씻은 그릇을 올려놓았다.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밥을 지었다.
밭에는 부지런히 콩도 심고 감자도 심었다. 농사지은 콩으로 두부를 만들고 된장, 고추장을 담았다. 배가 불러온다. 배가 부른다고 일을 안 할 수는 없다. 엉덩이를 붙일 틈이 없다. 가마솥 양동이마다 물을 다 채워놓고 며칠 먹을 음식도 다 준비해 놓았다.

 

내 나이 열여덟 살, 숨이 턱턱 막히는 여름에 첫째를 낳았다. 아들이다. 이름을 진모라고 지었다.
첫 아이 낳고 엄마는 딱 하루 와서 미역국을 끓여주고는 발길이 없었다.
남편은 남의 밭농사를 지었다. 아침에 밭일 하러 가면 늦저녁이 되서야 집에 돌아왔다.
그동안 난 혼자 아이를 돌보고, 소 여물주고, 밭일하며 보냈다.
소여물을 주면서 생각한다. 이 소가 우리 소라면 얼마나 좋을까? 남의 집 소를 키워주고 받는 돈은 쥐꼬리만 하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나는 누에도 키운다. 방 하나에 누에를 키우고 방 하나에 온 식구가 잤다. 누에 키워 벌은 돈은 애 옷 사고 비료 사면 없다.
그러는 사이 딸 하나를 더 낳았다.

농사지은 옥수수에 감자를 섞고 위에 보리를 흩뿌려 밥을 지어 먹었다. 말린 옥수수를 정비소에서 갈아서 강낭콩을 얹어서 옥수수밥도 해 먹었다. 쌀은 두 말 정도 사서 작은 독에 담아 제사 때, 생일 때 아껴가며 먹었다. 보리가 나기 전 보릿고개 시기에는 감자범벅을 해먹기도 했다. 감자에 강낭콩을 조금 넣고 밀가루를 흩뿌려 섞는다. 무르게 쪄지면 으깨어 섞어 먹는 것이다.
 셋째 예정일이 다 되어간다. 이번에도 미리 해놓을 일이 많다. 나는 김치를 담으러 부엌 뒤 곁으로 갔다. 그런데 두 세 계단을 올라 김칫독에서 김치를 꺼내 내려오다 계단을 헛딛고 말았다. 몸이 기울어지는 순간 둔탁한 통증이 팔에 전해졌다. 팔이 너무 아팠지만 병원이 멀어서 바로 갈 수가 없었다. 아픔을 참고 다음날 진모아빠랑 한참을 걸어 버스를 타고 병원에 갔더니 팔에 금이 갔다고 했다. 배는 남산만 하게 불러 서 있기도 힘든데 통기부스를 했으니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다음날 기부스를 한 채로 진통이 왔다. 설상가상 넘어지면서 아이가 돌아갔는지 머리가 아니라 다리부터 보인다고 했다. 진통은 길어지고 남편은 동네의사를 부르러 가고 난리가 났다. 하늘이 노래지는 걸 반복하다가 겨우 막내가 태어났다. 이 집에서 아이 셋을 낳았다. 동네 사람들은 죽을 뻔 했다고 내게 천운이라고 했다. 막내가 무사해서 다행이다.


8. 이사
 
막내가 막 돌 되기 전이었다. 김포로 이사를 가서 포도밭 관리를 시작 했다. 시골 살림은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고, 어디든 강원도 촌구석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한 달에 만 오천 원을 받았다. 진모 아빠는 인부들과 일을 하고 나는 새참을 해대느라 눈코뜰새 없는 날들이 이어졌다. 만만한 생활은 없는 것 같았다. 한날은 포도밭 주인이 포도밭을 살피러 왔다. 주인사내는 주인이 왔는데 와서 인사도 제대로 안 한다고 구시렁대었다. 거들먹거리는 주인행세에 울화가 치밀어 사내와 대판 싸우고 말았다. 그 길로 마을로 이사를 왔지만 하루 벌어먹고 사는 궁핍한 생활이 이어졌다.
 
그 때쯤 큰오빠에게 연락이 왔다. 올케 친정 쪽에 아는 사람이 울산에서 국회의원 사무실에서 운동을 했는데, 뭘 해먹고 살아도 거기보단 나을 거라는 말에 엄마랑 오빠 식구들은 얼마 전 울산으로 이사를 간 터였다.
“오빠, 적응은 잘 하고 있어요?
“지금 현대중공업에 들어가려고 이것저것 서류를 준비하고 있다”
 니도 연서방이랑 애들 데리고 울산으로 내려와라. 여기 대기업이 많아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 거다.”
 

 

울산! 울산이 어디지? 어디 붙어 있는지는 모르지만 시골은 아니다. 도시! 평생 시골에서 살아온 나는 팔 다리가 쑤시도록 일이 많은 시골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한편  깍쟁이들이 가득하다는 도시에서의 삶이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여기서는 애들을 키우기 힘들다.
 딱 피난 가는 꼴이었다. 진모 아빠는 이불보따리와 몇 안 되는 살림살이를 이고, 나는 막내를 업고 나머지 두 아이 손을 잡고 기차에 몸을 실었다. 저녁에 출발해서 다음날 새벽이 되어서야 울산역에 도착했다. 먼 길이었다. 역에서 내려 어스름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앞으로 펼쳐질 날들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강원도에서 울산으로, 생애 처음 도시에 터를 잡았다. 하지만 엄마가 미리 구해준 단칸방은 그리 번화가가 아니었다. 계획 없이 지어진 집들은 듬성하고 어수선했다. 그래도 여긴 도시다. 진모아빠는 한동안 공사장을 다니다가 큰오빠 소개로 현대정공에 들어갔다.


9. 도시생활

도시생활의 복병은 외로움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집에서 뛰어 놀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시골은 찌들게 가난해도 아이들이 뛰어다닌다고 타박할 사람이 없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좁은 집들, 거기다 주인집 옆방에 세 들어 사니 주인 눈치를 심하게 보게 되었다. 몇 번째 이사한 양옥집 주인은 노파였는데 까탈스럽고 신경질적이었다. 애들이 마당 시멘트를 신발을 끌면서 다닌다고 호통을 쳤다. 시멘트가 닳는다고 욕을 해댔다. 한창 복닥거릴 나이의 아이들. 뛰어 놀고 싶은 아이들...나는 쫓겨날까봐 가슴을 졸이다보니 신경은 예민해지고 아이들을 혼내고 야단치는 일이 늘어났다. 그 와중에 먹고 살려면 이것저것 일을 해야 했다. 병영동 중학교에서 선생 하는 집에 아기를 봐 주러 가고, 목재공장에 다니고 자동차부품 회사도 다녔다. 낚시 바늘 만드는 부업을 하기도 했다.
 

 

살림을 조금씩 늘리는 보람은 있었다. 푼돈을 벌어 마음먹고 카스텔라 제빵기를 샀다. 계란 한판을 사고 밀가루를 채에 쳐서 카스텔라를 구웠다. 아이들한테 간식을 사준 적이 별로 없다. 빵을 굽는 것이 신기했던지 여섯 개의 눈망울이 연신 빛난다. 한 판 굽기 무섭게 없어진다. 아이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참으로 행복하다.
 
아이들이 시끄럽다고 혼을 내는 욕쟁이 할머니와 결국 크게 싸우고 말았다. 방을 빼서 맞은편 골목길 안쪽 집으로 이사를 했다. 동천강 뚝으로 올라가는 길가에 있는 집이었다. 다행히 집주인은 사람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다. 어느 날 주인아주머니가 일을 갔다 오는 나를 불렀다.
“이봐, 애기 엄마, 일도 좋고 돈도 좋지만, 아직 막내가 어린데 아부터 보는 게 어떻노! 낮에 어디서 애 우는 소리가 나서 봤더니, 막내가 아무도 없는 집 문턱에 앉아 울고 있었다 아이가.”
 가슴에서 묵직한 바윗돌이 쿵 떨어졌다. 먹먹해진 가슴에 퍼런 멍울이 번진다.
내게 집은 꽉 막힌 벽이다. 정 없이, 입을 닫고 산 시간이 쌓이다보니 마음을 꺼내는 방법도 잊어버렸다. 나도 사랑받고 싶다. 아이들을 잘 키우고 싶다. 하지만 아이들만 바라보면서 살 수는 없다. 내 삶에 빛이 올까? 다 같이 웃는 날이 올까? 꽉 막힌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  어둡고 끝이 없는 터널을 걷는 것 같다. 하루하루 버티며 사는 삶, 변하고 싶다.

 

10. 시간 속을 걷다.

“할머니, 산딸기 따줘!”
시은이, 민재와 원미산에 왔다. 막내가 결혼해서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았다.
땅을 밟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다. 내가 키우면 죽어가던 화분도 활짝 살아난다.
내 나이 예순 여섯... 아니 예순 넷.
힘이 예전 같지 않지만 한 번씩 정성껏 밥을 지어 애들 내외를 부른다. 애들 입에 밥 들어가는 거 보는 게 그렇게 기분이 좋다. 젊을 때는 항상 날이 서 있어서 자식들이 예쁜 줄도 몰랐다. 손자, 손녀는 어찌나 예쁜지 모르겠다.
서른이 좀 넘었을 때 나는 아이들을 두고 두 번째 인생을 시작했다. 그 후회와 회환의 세월을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나는 행복할 자격이 있는가? 내가 너희들 곁에 있었으면 너희들이 행복했을까? 부질없는 질문을 수천 번 했었다. 잠시 행복한 웃음을 짓다가 내가 웃을 자격이 있는가? 수만 번 되뇌었다.
상념과 눈물과 웃음을 휘휘 감아 시간은 흘러간다. 흐르는 세월에 잠시 발을 멈추고 보니 내가 발 딛고 있는 곳은 부천이다. 나는 부천에 산다. 그것도 딸들 근처에서. 부산에서 수십 년을 살았는데 예순이 다 되어서 다시 김포 근처 부천에서 살게 될 줄 어떻게 알았을까?
내 아이들도 나이를 먹어가고 손자손녀도 쑥쑥 잘 자라고 있다. 가끔 딸들이 내 얼굴을 보며 외할머니를 닮았다고 할 때마다 깜짝 놀란다. 내가 벌써 할머니가 되었구나. 세월의 주름이 쌓였구나 싶어 만감이 교차한다. 그렇지. 나의 엄마, 김향화.

나의 엄마는 십 이년 전에 아버지를 따라 가셨다. 막내 종희네와 살며 손녀, 손자 키우고 뒤치다꺼릴 다 하더니 말년에 치매로 고생하다 다리가 부러져 요양원에서 쓸쓸하게 돌아가셨다.
치매초기쯤 웬일로 엄마는 큰 딸네 가고 싶다고 하셨고 종희가 엄마를 모시고 왔다.
작은 체구로 긴 세월을 살아오시더니 이제 몸도 마음도 한없이 쪼그라드신 모습이었다.
그날, 챙겨드린 밥을 잘 잡수시던 엄마가 갑자기 툭 뱉었던 한 마디를 잊을 수 없다.
“영숙아, 니 어릴 때 내가 왜 그리 모질게 했는지 모르겠어...”
그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왜 그랬을까? 난 아이들에게 왜 그랬을까?

 

나이 들고 보니 단지 누구나 처음 살아보는 인생이었던 것이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해내며, 최선이라 믿으며 살아낼 뿐이었다. 나이가 든다고 완벽해지지도 않으며, 나약하고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 속에 부딪치는 실수를, 약한 모습을... 나는 받아들이는 중이다. 엄마를, 내 아이들을... 그리고 나 최영숙을 사랑한다.

<언니네 글밭>은 2017년 여러가지연구소에서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글로 정리하고 소통하고자 글 씨앗을 뿌린 여성주의 글쓰기 모임입니다. 작은 책으로 출판한 언니네 글밭의 글을 콩나물신문에 연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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