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까지 우리는 화석연료를 파 쓰면서 더 편하고 더 빠르며 더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국내라면 안 가본 데가 없을 지경이 되었고, 이제는 평범한 사람도 아주 먼 남극대륙까지 다녀올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며, 더 큰 아파트에서 살고 더 많은 육식을 하는 것이 우리를 윤택하게 해주고 있다는 착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다 보니 지구는 有限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지구가 유한하다면 경제성장은 지속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함에도 많은 사람들은 성장주의자들이고 싶어 합니다. 사실과 다르게 성장은 더 잘 산다는 뜻으로 통하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지속적 성장이라면 그런 성장은 일찌감치 포기해 두는 것이 나을지 모릅니다.

나도 성장주의자인가?
지금 전쟁은 다른 말로 하면 바로 석유쟁탈전입니다. 중동지역의 불안이나 베네쥬엘라의 비극적 사태도 석유를 강탈하려는 강도같은 나라와 목숨 걸고 그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약한 나라 사이의 피나는 싸움입니다. 파내서 쓸 석유가 끝나 갈수록 석유가 점점 더 중요해집니다. 석유피크는 이미 지난 지 오래입니다. 그러니 석유값은 계속 올라갈 수 밖에 없습니다. 더 윤택해지고 싶지만 석유자원이 고갈되면서 물질적 삶의 향상은 불확실해졌습니다. 멀리 내다보는 나라들은 이미 화석연료 발전 대신 재생에너지 개발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시민들이 덜 벌고 덜 쓰는 삶에 희망이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하기 시작했어요.

라이프 스타일 향상에 기여하리라던 기술개발이 오히려 사람을 향해 역습을 하고 있습니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일자리는 그 절대량이 오히려 갈수록 줄어든지 오래고, 그 품질은 갈수록 낮아지고 있습니다. GMO는 농업자본은 물론 세계 곡물 메이저들과 금융자본의 배만 불리고 우리 일반인의 건강을 위협합니다. 이미 생명까지 경제 범주에 포섭되면서 거래의 대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기술개발은 오직 자본을 기쁘게 하는 듯 보이지만 그들도 결코 행복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불행한 다수와 사는 행복한 소수도 진정으로 행복하기는 어려울테니 말입니다.

기후위기를 말해라!
양극화에 따른 불평등이 갈수록 심해지는 판에 기후위기가 인류를 무차별적으로 덮치고 있습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기후변화라고 불러 오던 기후현상입니다만 올해 4월부터 가디언지가 기후변화를 기후위기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기후위기가 사실에 걸맞지 않는 이름인 기후변화란 이름으로 오랫동안 불려온 것도 누군가의 불순한 의도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위기의 실상이 이름조차 은폐하고 어떻게 감춰져 올 수 있었겠어요.

사악한 침묵
 기후위기의 주된 원인인 지구온난화는 산업혁명기 이후 계속되어 왔고 많은 과학자들의 경고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나라도, 어떤 지도층도 이 위기가 위기라는 것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정치와 정치인들이 침묵해 왔습니다. 모든 나라의 정부도 모른체 해왔습니다. 그 사악한 침묵 뒤에는 틀림없이 자본과의 유착이 숨어 있을지 모릅니다. 국가권력이 자본의 개가 된 지는 아주 오래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언론은 광고주의 손에 따라 움직입니다. 말을 듣지 않는 언론은 자본의 공격을 피할 수 없습니다. 모든 권력의 원천은 자본입니다. 국가권력이 자본 앞에서 초라해진지는 오래입니다. 그래서 모든 국가는 기후위기에 대하여 책임질 힘도 의지도 없습니다. 기후위기에 대응하고 지구를 구하기 위해서는 오직 주권자인 국민이 먼저 깨어야 합니다.

온실가스가 몰고 온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덜 벌고 덜 쓰는 삶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 탈성장론자들의 연구 결과입니다. 기후로 인한 멸종사태를 피하려면 무엇보다도 탄소의 배출을 줄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탄소를 줄이는 길은 모든 생산활동을 줄임에 따라 소득이 줄어야 하고 이어서 유통과 소비도 엄청나게 줄어야 합니다. 우리 삶이 지금 이대로 간다면, 지표온도가 산업혁명기 이전보다 2℃ 올라가는데 20년이 채 안 남았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지금까지 올라간 지표온도가 1℃정도인데, 우리는 이미 극단적인 이상기후의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앞으로 20년 내에 1℃ 정도 추가로 더 올라간다면 재앙수준의 기후이변을 피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자발적 소박함
GDP가 줄어드는 사회. 언뜻 보면 덜 일하고 덜 벌고 덜 쓰는 삶은 쪼그라든 삶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멸종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강요에 의해 탈성장경제를 받아 들이기보다, 미리미리 쪼그라든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는 없을까요? 쪼그라든 삶은 과연 반드시 두렵고 피하고 싶은 삶일까요?

후손들에게 이 아름다운 지구를 온전히 물려주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소박한 삶을 자발적으로 선택한다면, 오히려 우리는 정신적 가치들을 즐기면서 '탄소 없는 fossil fuel free 삶'을 실천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덜 일하는 것은 여유 시간을 더 많이 가지게 할 것입니다. 자발적이 아닌 타의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처음으로 일중독으로부터 벗어나 보게 될 것입니다. 덜 벌어도, 덜 쓰고 살 수 있다면 큰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유사 이래 인간은 결핍의 삶을 살아 왔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 많이 써대는 삶이 오히려 낯선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쪼그라든 삶이 오히려 우리의 웰빙을 증대시켜 줄 지 모릅니다.

덜 일하되, 좋은 삶
 영국의 autonomy연구소는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서는 주 9시간 노동 가능성을 제안합니다. 엄청난 노동의 감축이자 상응한 소득의 감소를 예고합니다. 1주일에 9시간만 일하고 살아야 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삶의 개념을 다시 규정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이 행복인지, 무엇이 진정한 풍요인지, 무엇이 至高의 가치인지도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가치의 순위는 뒤바뀔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을 지탱해 오던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거부가 선행하고, 새로운 시스템의 등장이 불가피할 것입니다.

우리사회는 성난 사회라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2017년에 한국인의 29.4%가 중증 울분을 갖고 있고, 13.3%는 만성 울분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이 중증 울분이 1년 만에 39.9%로 치솟았습니다. 이런 울분이 집단 내의 따돌림이나 괴롭힘, 차별, 착취에서 가장 많이 유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차별적 지위에서 오는 갑질, 공적 부패와 은폐, 언론의 침묵이나 왜곡과 편파보도 때문이고 정치의 부패도 울분 유발에 똑같이 기여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어디에서도 사람은 보이지 않고, 오직 GDP와 상품화된 노동과 미친듯한 소비와 공공성이 실종된 각자도생만 판치는 일그러진 세상이어서가 아닐까 합니다. 이에 반하여 독일 사람들은 2.5%만이 만성 울분과 싸우고 있다니 잘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성찰해야겠습니다.

시간이 없다
 쪼그라든 경제 즉 덜 일하고 덜 벌되 새로운 수준의 웰빙을 즐기면서 炭素排出제로의 삶을 선택하든지, 아니면 탄소배출을 계속하면서 성장과 물질에 빠져 살다가 멸종사태를 맞이하든지, 피할 수도 없고 거부할 수도 없는 딜레마가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돌아보면 다행하게도 부자로 산 지가 그리 오래이지 않습니다. 부자습관이 고칠 수 없을만큼 오래된 습관이 아닌 것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잘 살 수 있었듯이, 마음을 고쳐 먹으면 소박했던 삶으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입니다. 인간이라는 동물일 뿐이고 생태의 일부분입니다. 인간동물에게 저만 부자로 살기 위해 다른 모든 非인간동물은 물론 모든 생명을 멸종시킬 권리는 없습니다. 어리석지 않은 인간동물로 남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럴 시간도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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