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프랑스 콩피에뉴의 한 가정집에서 르네상스 미술의 선구자 지오바니 치마부에의 그림이 발견되어 화제가 됐다. ‘조롱받는 예수’ 연작 중 하나로 밝혀진 이 그림의 예상 경매가는 무려 650만 달러(약 77억 원), 하지만 그림의 가치를 몰랐던 주인은 그저 오래된 성화(聖畫)로만 생각하고 그것을 부엌에 걸어두고 있었다고 한다. 집을 팔기 전에 혹시 값나가는 가구나 장식품이 있을까 해서 경매인에게 감정을 의뢰했는데, 만약 그때 경매인의 눈에 띄지 않았더라면 이 그림은 벌써 폐기물 처리장으로 보내져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른다.

  멀리 프랑스만의 일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같은 일이 종종 벌어지곤 하는데, 예를 들어 조선 숙종 때 화가인 윤용(尹愹)의 ‘미인도’는 종가 유물을 정리하던 중 쓰레기더미에서 발견되었고, 다산(茶山) 정약용의 하피첩(霞帔帖) 역시 경기도 수원에서 폐지 줍는 할머니의 수레에서 발견되어 우여곡절 끝에 다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윤용은 조선 중기 시조문학의 대가인 고산(孤山) 윤선도의 후손으로, 그의 조부는 현재(玄齋) 심사정, 겸재(謙齋) 정선과 함께 조선의 ‘3재(三齋)’로 불리던 공재(恭齋) 윤두서이다. 정약용의 하피첩(보물 제1683-2호)은 다산이 강진 유배 생활 중 아내가 보내준 치마를 재단해 만든 서첩(書帖)으로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글 등이 담겨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운곡(雲谷) 이강회(李綱會)의 문집 역시 앞의 미인도나 하피첩처럼 휴지로 사용하던 고서 더미 속에서 운 좋게 발견되었다. 그의 문집 『유암총서((柳菴叢書)』와 『운곡잡저(雲谷雜著)』는 1979년 섬 민속 연구를 위해 전남 신안군 도초면 우이도를 찾았던 최덕원 순천대 교수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만약 이 문집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이강회라는 실학자의 존재는 물론이고, 19세기 조선의 해양 표류기(漂流記)로서 큰 의의가 있는 손암(巽菴) 정약전의 「표해시말(漂海始末)」 역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을 것이다. 「표해시말」은 ‘홍어 장수 문순득의 이야기’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데, 소흑산도(오늘날의 우이도)에 살던 홍어 장수 문순득이 홍어를 사기 위해 태사도라는 섬에 갔다가 돌아오던 중 표류하여 유구(오키나와), 여송(필리핀), 오문(마카오), 광동, 남경, 북경 등을 거쳐 3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야기이다. 이 문순득의 이야기가 당시 우이도에 유배 중이던 정약전에 의해 「표해시말」이라는 글로 기록되었던 것인데, 그렇다면 「표해시말」이 왜 하필 강진 사람 이강회의 문집에 수록되었으며, 이강회의 문집은 또 어떤 까닭으로 우이도에서 발견된 것일까? 그 흥미진진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유암총서에 들어있는 표해시말 시작 부분. 유암총서와 운곡잡저는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75호로 지정되어있다.(사진제공 문화재청)

 
 정조(正祖) 사후, 노론 벽파(僻派)가 정권을 잡으면서 반대파인 시파(時派)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자행되었다. 그런데 시파 중에는 남인 천주교도들이 많았으므로 시파에 대한 탄압은 곧 천주교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졌다. 순조 1년(1801)에 벌어진 ‘신유박해(辛酉迫害)’는 이 같은 천주교 탄압의 대표적인 사례로서 이로 인하여 정약용 일가도 크나큰 피해를 입게 된다. 약용의 셋째 형 약종과 매제 이승훈, 사돈 홍낙민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고, 조카사위 황사영은 조선 조정의 천주교 탄압 사실을 로마 가톨릭교회 북경 교구의 주교에게 알리려다 발각되어 능지처참당했다. 약용과 둘째 형 약전은 적극적인 배교(背敎) 행위를 통해서 비록 죽음만은 면했으나 약전은 신지도를 거쳐 흑산도로, 약용은 장기(오늘날의 포항)를 거쳐 강진으로 유배되어, 약전은 결국 흑산도에서 죽고 약용은 18년만에야 가까스로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하늘이 위대한 시인을 내기 위해 일부러 고난을 준다는 말처럼 두 사람은 인생의 혹독한 시련을 통해 위대한 학자이자 저술가로 다시 태어났다. 정약용은 강진 유배생활 중 5백여 종의 방대한 저서를 완성하여 조선 최고의 사상가로 우뚝 섰고, 정약전은 비록 많지는 않지만 홍어장수 문순득의 표류기인 「표해시말」과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생물 백과사전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집필하여 조선 후기 실학사에 중요한 한 획을 그었다.

  「표해시말」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홍어장수 문순득이다. 그는 다섯 명의 일행과 함께 지금의 흑산도와 가거도 사이에 있는 섬 태사도(현재의 태도)에 홍어를 사러 갔다가 큰바람을 만나 유구국의 아마마오시마에 표착하였다. 이후 유구국의 수도 나하, 필리핀의 살로마기, 비간, 중국의 마카오, 광동, 남경, 북경을 거쳐 천신만고 끝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문순득의 훌륭한 점은 그가 문자에 대한 지식이 그리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관찰력과 기억력을 가졌다는 점이다. 그는 고향인 소흑산도(우이도) 진리마을로 돌아온 후 정약전을 만나 자신의 경험담을 하나하나 털어놓았고 정약전은 이것을 여정, 풍속, 건축, 의복, 선박, 토산, 언어 등의 순으로 정리하여 「표해시말」이라는 한편의 표류기를 탄생시켰다. 그러니 문순득의 뛰어난 관찰력과 기억력이 아니었으면 「표해시말」은 처음부터 존재할 수 없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표해시말」에서 정약전의 역할은 단순한 기록자의 그것에만 머무르고 마는가? 결코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정약전은 오히려 「표해시말」을 통해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적극적으로 개진하려 한 측면이 있다. 정약전은 아우 정약용과 함께 일찍부터 서학(西學)을 접하였고 이를 통하여 서양의 발달된 학문과 과학기술에 대해 알고 있었다. 특히 당시 마카오는 국제적인 교역항으로 동서양의 수 많은 상인들이 어울려 자유롭게 상업을 영위하는 곳이었다. 정약전은 어쩌면 문순득의 눈과 귀를 빌려 당시 조선에도 마카오와 같은 과감한 변화와 개혁이 필요함을 역설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243호 우이도 선창. 우리나라에 형태가 거의 완전히 남아있는 유일한 전통 포구시설이다. 뒤쪽으로 문순득의 생가와 정약전의 적거지가 있는 진리 마을이 보인다.

  「표해시말」은 이후 강진에 있는 아우 정약용에게 전해졌고, 이는 다시 정약용의  제자인 이강회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강회는 스승 정약용이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 마재로 돌아가자, 1818년 직접 우이도로 들어가 문순득의 집에 머물며 이런저런 궁금증을 해결하는 데 힘썼다. 이는 「표해시말」을 쓸 당시, 정약전이 대흑산도(현재의 흑산도 사리마을)로의 이주를 앞두고 있었던 터라 다소 소략한 부분이 없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강회는 문순득과 함께 기거하며 「표해시말」의 미진한 점을 보충한 것은 물론, 외국의 선박 제도에 관한 정보를 취하여 따로 「운곡선설(雲谷船說)」을 쓰기도 했다. 이강회는 우이도 문순득의 집에 두 권의 문집을 남겼는데 서두에서 말한 『유암총서』와 『운곡잡저』가 바로 그것이다. 『유암총서』에는 「표해시말」, 「운곡선설」 외에 「거설답객난」, 「제거설」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운곡잡저』에는 상부 관아에 보낸 각종 공문서와 정약전이 당시의 소나무 정책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정리한 「송정사의(松政私意)」, 또 기타 이강회가 쓴 잡문들이 실려 있다.

  이강회는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의 이름 없는 서생으로 오늘날에도 그 이름이 미미하지만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세계사의 흐름을 잘 이해하고 당시 조선의 현실을 정확히 인식했던 깨어있는 선비였다. 그의 저술은 철저히 실학사상에 입각해 있으며 이용후생의 학문적 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강회는 당시 중앙 정부의 폐쇄적인 관료집단들이 감히 생각할 수 없었던 혁신적인 조치들, 예를 들면 과감한 문호개방과 자유로운 물자유통 등을 적극 주장하였으며, 이러한 주장들을 문집으로 남겼으니 그 문집들이 하마터면 휴지 조각이 되어 사라져버릴 뻔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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