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전은 흑산도에서 16년간 유배 생활을 했다. 신유년(1801) ‘서교(西敎)에 빠져 바르지 못한 사설을 널리 퍼뜨린 죄’로 신지도에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다시 흑산도에 유배된 것이 같은 해 11월 하순이었다. 이때부터 정약전은 소흑산도(우이도)와 대흑산도를 오가며 유배 생활을 했고 끝내 풀려나지 못한 채 병자년(1816) 6월 6일, 소흑산도에서 숨을 거두었다.

사리마을 유배공원에 있는 정약전 동상

아우 정약용이 쓴 「선중씨 묘지명(先仲氏墓誌銘」에 따르면 정약전은 건륭(乾隆) 무인년(1758) 3월 1일에 마현(馬峴) 사택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비범함과 남다른 기개를 지녔다. 서울의 젊은 사류 이윤하, 이승훈, 김원성 등과 교유하였으며, 성호 이익과 녹암 권철신의 학문을 전수 받았다. 경술년(1790) 여름, 증광시와 회시에 대책(對策)으로 합격하였고 정사년(1797) 가을에 성균관 전적을 거쳐 병조좌랑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경신년(1800)에 정조가 죽고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면서 천주교 신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일어나자 결국 아우 정약용과 함께 강진과 흑산도 유배형에 처해졌다.

정약전은 흑산도 유배 생활 중에 『표해시말(漂海始末)』, 『송정사의(松政私意)』, 『자산어보(玆山魚譜)』 등의 저서와 약간의 시문을 남겼다. 잘 아는 바와 같이 『표해시말』은 우이도 사람 문순득이 홍어를 사러 갔다가 표류하여 3년 만에 돌아온 후 그가 경험했던 유구, 필리핀, 마카오 등의 풍속, 언어, 문물, 제도 등을 기록한 책이고, 『자산어보』는 그가 흑산도 사람 장창대의 도움을 받아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생물 백과사전이다. 이 책에는 흑산도 근해에 자생하는 해양생물 55류, 226종이 크기, 형태, 색, 외형 특징, 생태, 맛, 이용법, 어획 시기, 어획 방법, 용도 등과 함께 실려 있다. 물론 정약전 사후에 정약용의 제자인 이청(李晴)이 빠진 것들을 보충하고 문헌 고증 등을 추가한 것도 사실이다.

『송정사의』는 정약전이 소흑산도에 머물 때인 1804년 겨울에 쓴 것으로 당시 조정의 소나무 정책에 대한 의견을 개진한 글이다. 정약전은 이 글에서 우리나라는 산지가 많을 뿐만 아니라 모두 소나무가 자라기에 적합한 조건임에도 소나무가 부족해서 산 사람은 집을 지을 수 없고, 죽은 사람은 관을 만들 수가 없으며, 전쟁에 필요한 전함을 만들 수가 없으니 위정자들은 마땅히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갖고 그 해결책을 모색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는 전적으로 흑산도 주민들의 고충을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결하려는 그의 선의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촌서당 현판. 다산의 글씨를 집자하여 새긴 것이다.

이 글에서 정약전이 제시한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산에 소나무가 없는 까닭은 백성들이 산에 나무를 심지 않을 뿐 아니라, 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하고 또 화전민들이 산을 불태우기 때문인데, 화전민의 경우에는 엄격한 법 집행이 필요하다. 백성들이 나무를 심지 않는 이유는 나라의 잘못된 소나무 정책 때문으로, 바닷가로부터 30리 이내의 산은 국가나 개인 소유를 막론하고 일절 벌목을 금지하는 까닭에 자기 산의 나무를 베어 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몰래 나무를 벴다가 걸리기라도 하면 가혹한 세금을 물어야 하니 백성들이 소나무 보기를 원수처럼 여겨 작은 싹만 봐도 뽑아서 없애 버린다. 백성들이 소나무를 미워하는 것은 소나무 자체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법을 미워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할 것인가? 정약전의 해법은 바로 『대학(大學)』에 나오는 다음 구절이다.

“생산자가 많고 소비자가 적으면 재물은 항상 넉넉할 것이다(生之者衆, 爲之者寡, 財恒足矣。)”

요지인즉, 백성들로 하여금 사유지에 소나무를 많이 심고 가꾸어 이를 사용하도록 하면 백성들도 이익이 될뿐 아니라 나라 소유의 공산도 나무가 풍부해져 나라와 백성이 모두 이익이 되리라는 것이다.

성당 뒤쪽에 사촌서당이 있다.

정약전은 유배지에서 자신의 학문이나 신분을 과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섬 주민들과 소통하고 화합하려고 애썼다. 그는 섬의 어부나 나무꾼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함께 시를 주고받기도 했다. 정약용은 흑산도 사람들을 ‘오랑캐 같은 섬사람’이라고 표현했지만, 정약전은 그들과 기쁘게 친구가 되었다. 정약전이 흑산도 주민들로부터 얼마나 큰 신뢰를 받았는가에 대해서는 다음 사건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정약전이 대흑산도 사촌 마을에서 서당을 운영하고 있을 때였다. 1814년 여름, 동생 약용이 유배에서 풀려날 수 있을 것 같다며 대흑산도로 찾아와 형을 만나겠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그러자 정약전은 “아우로 하여금 나를 보기 위하여 험한 바다를 건너게 할 수 없으니 내가 소흑산도에 가서 기다릴 것이다.”하고, 돌아가려 했으나 대흑산도의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 못가게 붙잡으므로 몰래 소흑산도 사람에게 배를 가지고 오게 하여 안개 낀 밤을 틈타 첩(妾)과 두 아들을 싣고 소흑산도를 향해 떠났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정약전이 떠난 것을 안 주민들이 배를 몰고 뒤쫓아와서 정약전을 다시 대흑산도로 돌아가게 했다. 하는 수 없이 대흑산도로 돌아간 정약전은 그후 1년 만에야 겨우 사람들을 설득하여 소흑산도로 나올 수 있었다.

복성재(復性齋)라고도 하며 정약전이 소흑산도에서 이곳 사리마을로 옮겨와 세운 서당이다. 아우 정약용이 쓴 「사촌서실기(沙村書室記)」가 있다.

정약전의 흑산도 유배 생활과 관련된 소설로는 한승원의 『흑산도 하늘길』(문이당, 2005)과 김훈의 『흑산』(학고재, 2011) 등이 있다. 한승원의 소설이 비교적 사실성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면 김훈의 소설은 작가 특유의 상상력이 많이 동원되었다. 한승원 소설에 등장하는 사공 문순득은 김훈 소설의 문풍세이고 첩(妾) 거무는 순매이다. 거무는 소흑산도 처녀이지만 순매는 대흑산도의 나이 어린 과부이다. 한승원 소설에서 정약전은 나주 다경포에서 배를 타고 소흑산도로 가지만, 김훈 소설에서는 무안 포구에서 곧장 대흑산도로 간다. 역사적 사실과 소설가의 상상력을 비교해 가면서 두 권의 소설을 읽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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