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24일, 소사리 독립 만세 운동 기념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지부장 박종선)324일 오전 10시에 양경직 계남역사문화연구소 소장과 함께 대일항쟁기(일제강점기) 일제가 부천을 지배하고 수탈하기 위해 설치했던 각종 기관을 알아보는 역사 답사를 진행하였다. 이번 역사 답사는 부천의 3.1운동인 <소사리 독립 만세운동>324일에 일어나 이날을 기념하고, 동시에 일제 잔재를 알아보기 위해 추진되었으며, 부천지부 회원뿐만 아니라 시민들도 참여하였다. 참가자 중 한 명은 멀리 남양주에서 부천의 역사를 알기 위해 참여하였으니 그 의미가 더 깊다고 하겠다.

우리 부천은 급속한 도시 개발로 근대 문화유산의 유적이 거의 사라져서 그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일제의 식민 통치로 인해 남아 있는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만에 하나 이 땅에 다시 다른 나라가 침략하더라도 과거처럼 개인의 이익을 위해 나라와 민족을 배신하는 사람들이 나오지 않도록 교훈을 얻기 위해 역사 답사는 꼭 필요하고 여기에 관한 연구도 지속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기존 역사 답사는 지난 2018년 경기문화재단에서 설치한 항일 독립운동유적 안내판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지만, 이번에는 그 위치가 알려지지 않았던 기관들을 직접 찾아가 위치를 특정하며 진행되었다.

 

대일항쟁기 부천 지역 일제 통치기관 답사
대일항쟁기 부천 지역 일제 통치기관 답사

 

일제의 행정기관과 수탈기관은 모두 부천역 남부에 있었다.

일제는 우리나라를 강제 병합하기 전에 이미 침략의 발판을 경인선 철도를 통해 마련하였다. 1899918일 노량진과 제물포 사이 33.2km에 경인선이 개통되었는데, 그 사이에 소사역(현 부천역)이 위치하게 되었다. 일제는 소사역을 통해 부평평야와 김포평야에서 생산되는 쌀을 일본으로 반출하였다. 일제는 1880-90년대에 흉작으로 쌀이 매우 부족해 그 부족분을 조선에서 충당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곳이 바로 부천이었다. 일제의 쌀 반출이 늘면서 소사역에 물류가 많아지고 자본이 더해져서 사람들이 몰리게 되었다. 일제는 식민 지배와 수탈이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이곳에 면사무소, 주재소, 우편소 등 여러 기관을 설치하였다. 1920년대 중반이 되자 소사역 부근은 점점 도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대일항쟁기 부천 지역 일제 통치기관 답사 장면
대일항쟁기 부천 지역 일제 통치기관 답사 장면

 

첫 번째, 계남면사무소

일제는 1917(대정 6) 105일 조선총독부 경기도 고시 제50호를 통해 중리(中里)에 있던 면사무소를 계남면 심곡리 538번지로 이전하였다. 이곳의 위치는 현재 심곡본동 551-9로 공영주차장이 있는 곳이다. 계남면은 193141일 자로 소사면으로 개칭되는데, 면사무소는 그해 108일 소사면 심곡리 549번지, 현재의 경원여객 자리(심곡본동 737-4번지)로 다시 이전된다.

계남면사무소의 위치를 알면 소사심상소학교와 소사보통학교의 위치도 알 수 있다. 일제는 부천에 정착한 일본인들의 자녀 교육을 위해 1913년 소사심상소학교를 설립하고, 1925년에는 조선인 학생을 위한 소사공립보통학교를 설립하는데, 이 두 학교 모두 계남면사무소 옆에 위치하였다. 이 두 학교는 1935년 경인국도를 신설하면서 이전하는데 소사심상소학교는 1935년 이전하여 부천남초등학교의 전신이 되었고, 소사공립보통학교는 1937년 원미동으로 이전하여 부천북초등학교의 전신이 되었다.

 

대일항쟁기 부천 지역 일제 통치기관 답사 장면
대일항쟁기 부천 지역 일제 통치기관 답사 장면

 

두 번째, 소사금융조합(素砂金融組合)

경제 자본 수탈의 선두에 금융조합이 있었다. 부천군에 3개의 금융조합이 설립되었는데 1911, 소사금융조합이 심곡리에 가장 먼저 설립되었다. 주안금융조합은 1921, 부평금융조합은 1928년 설립되었는데 이를 통해 당시 소사역 일대의 경제력이 가장 컸음을 알 수 있다. 소사금융조합이 들어선 곳은 지금의 자유시장 상인회가 있는 곳이다. 자유시장 상인회 사무실이 있는 곳의 사거리를 기준으로 북쪽에는 소사금융조합이 맞은편 남쪽에는 순사주재소, 부평수리조합, 우편소가 위치하였다. 1919324일 밤, 소사리 6개 마을 주민들이 높은 곳에 올라가 장작불을 피우고 만세를 부를 때 출동한 순사가 근무하던 곳이 바로 이곳 순사주재소였다.

 

소화4년(1929)에 제작된 부천군 군세일반 지도
소화4년(1929)에 제작된 부천군 군세일반 지도

 

세 번째, 소사시장과 자유시장의 출발

양경직 소장에 의하면 그 당시 부천역 남부지역 토지는 거의 일본인 소유였다. 1927년 소사시장이 만들어지게 되는데, 조합비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은 소사시장에 입점하여 장사를 하였으나 그럴 수 없는 조선인들은 소사역 입구부터 소사시장 사이에 난전을 펼치고 장사를 했다. 자유시장은 광복 이후에 문을 열었는데 상권이 커지면서 소사시장을 흡수하는 현상이 발생했다고 한다.

소사시장 인가 기사
소사시장 인가 기사

 

네 번째, 소사 우시장

소사시장에 이어 1934년 소사 우시장이 만들어지게 되는데 그 위치는 바로 현재의 심곡본1동 행정복지센터가 있는 곳이다. 2,000여 평으로 1949년 소사리로 이전하기까지 15년간 이곳에 위치하였다.

 

다섯 번째, 소사신사

현재 심곡도서관이 위치한 곳은 바로 소사신사가 있었던 곳이다. 소사신사는 일본 황실의 조상신과 명치천황을 모신 곳으로 우리의 민족성을 말살하고 내선일체를 위해 1917년 설립하였다. 심곡도서관에 올라가면 부천이 한눈에 다 들어오는데, 100여 년 전에는 부천, 김포, 인천 계양까지 한눈에 볼 수 있는 명당자리라 할 수 있다. 일제는 여기에서 침략전쟁 기념, 지원병모집, 천장절 등 각종 봉고제를 진행하였는데 이러한 행사들은 일제에 적극 협력했던 지역의 조력자들이 있어 가능했다고 양경직 소장은 강조하였다.

심곡도서관 앞에서 단체 사진을 촬영하는 것으로 답사를 마무리했는데, 기온이 갑자기 올라 더운 날씨임에도 참가자들 모두 양경직 소장의 해설을 들으며 즐거운 마음으로 임하였다. 2시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부천의 항일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우리 조상들이 핍박받고 박해받았던 역사를 알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부천지부는 앞으로도 이러한 부천의 역사를 많은 시민이 알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며, 조례를 근거로 부천시와 협의하여 안내판을 세우도록 노력할 것이다. 해설을 맡아 주신 양경직 소장과 참가자 여러분께 다시 한번 감사 인사드린다.

 

박종선(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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