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 공모사업 콩시루 “심쿵 뻔뻔한 공정여행”이 따사로운 봄에 시작하여 이제는 무더운 여름을 지나, 수확의 계절 가을.....막바지를 향하고 있다.  안동 하회마을로 가는 공정여행은 콩시루의 아쉬움을 하늘도 아셨는지 비까지 주룩주룩 내렸다. 일 년 동안 활동한 것을 책으로 만든 결과물과 콩나물 신문 그리고 떡을 나눠주며 화기애애하게 출발했다.
 
부천에서 출발한지 3시간 40분 정도 가자 병산서원에 도착 했다. 병산서원에 들어가기 위해 비포장 15분 정도 들어가자, 차량의 왼쪽 편에 낙동강 줄기가 보였다.
 류성룡 선생님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장군과 권율 장군을 선조에게 천거해서 벼슬길에 오를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임진왜란이 끝나고 전쟁에 책임을 지고 고향으로 낙향하여 ‘징비록’이라는 저서를 지필하시기도 하셨다.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이 31세 때에 건립하여 후진을 양성하던 서원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인재를 양성하는 학교이다. 서원의 솟을대문은 복례문(複禮門), 즉 예를 다시 갖춘다는 경건한 이름을 가진 문이다. 복례문을 지나 만대루 아래를 지나자 병산서원 현판이 보였다. 마루에 앉아 만대루 기둥사이로 보이는 낙동강과 펼쳐진 모래사장이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액자 속에 가둬놓고 산수화를 보는 느낌이다. 병산서원을 담은 사진을 찍고 싶다면 마루 뒤에 있는 판자문을 열고 만대루와 병산서원 앞마당 그리고 앞으로 펼쳐진 산자락과 낙동강, 그리고 모래사장을 모두 담을 수 있어서 인생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인생 샷을 찍을 수 있다고 한다. 콩시루는 인원이 너무 많아서 병산서원 현판이 나오게 마루에 걸터앉아 사진을 찍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병산서원에는 동재 서재, 입교당, 장판각 전사청, 고직사 등의 건물이 있다.

 

동재에는 선배가 머물고, 서재에는 후배가 머물렀다고 한다. 지금으로 생각하면 기숙사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입교당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장소로 병산서원 대청마루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병산서원 뒤뜰로 가자, 존덕사가 있었다. 존덕사는 서애 류성룡 선생님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지금은 계단 너비가 넓지만, 본래는 한 사람만 지나다닐 수 있는 폭이었다고 한다. 예부터 우리나라는 예절을 중요하게 여겨서 제사를 지낼 때 한사람씩 예의를 지키면서 올라가고 내려갔다고 한다. 존덕사 왼편에는 서고의 역할을 하는 장판각이 있었다. 돌아 나와서 달팽이 모양의 밖에 있는 화장실을 봤다. 화장실은 지붕이 없고 아주 어설프게 담장을 달팽이 모양으로 둘러져 있어서 ‘과연 저기서 마음 편하게 볼일을 볼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병산서원에서 10여분 차를 타고 가자 부용대에 오르는 길목에 도착했다. 부용대 가파른 언덕을 10분정도 올라가자 안동하회 마을을 낙동강이 S자로 감싸고 흐르는 모습이 한 눈에 보였다. 부용대는 선유줄불놀이를 하는 최적의 장소였다고 한다. 선유줄불놀이는 옛 선비들이 음력 7월 16일에 보름달이 떠오르면 지체 높은 양반들은 낙동강에 배를 띄우고 시와 가무를 즐기면, 노비들이 부용대 위로 올라가서 소나무줄기에 불을 붙여 떨어트려주면, 떨어지는 불을 보면서 불꽃놀이를 즐기는 놀이이다. 옛 날에 한 사람은 뱃놀이를 즐기고 다른 한 사람은 언덕길을 헉헉대고 올라가서 깜깜한 밤에 불을 밝혀줘야 하는 것을 보면, 신분사회의 불공평함이 여실히 보여주는 것 같다. 하지만 요즘 사회도 즐기는 자가 있으면 그 여가를 즐기기 위해서 도와주는 여러 손길들이 있다. 예전과 지금의 차이가 있다면 도와주는 손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한다는 것이 다르다.

 

 
부용대에서 내려와 20여분 차를 타고 가자 안동 하회마을 초입의 장터에 도착했다. 장터에서 점심식사로 맛있는 간 고등어 정식과 안동찜닭을 먹었다. 밑반찬으로 나온 여러 가지 나물이 정갈하고 맛있었다. 여러 번의 공정 여행도 있었지만 이 번 공정 여행은 베푸는 여행으로 그동안 활동한 수익금으로 점심을 대접해 드렸다. 맛있는 음식을 대접받은 사람들마다 얼굴에 웃음꽃이 만발했다. 너무 잘 먹고 전문 해설가 선생님의 해설도 들어서 너무 즐겁다고 했다.
점심식사를 하고 안동하회마을의 류성룡과 류운룡의 종택과 탤런트 류시원의 본가를 둘러보고 나오는 일정이다. 장터에서 안동하회마을까지는 셔틀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많은 인원이 이동하는 것이라서 걱정도 좀 되었지만 질서 정연하게 이동하는 모습을 봐서 안심이 됐다.
 
하회마을에서 처음 살펴본 건물은 원지 정사이다. 원지산을 바라보고 있다고 하여 원지정사로 이름 지었다. 류성룡 선생님께서 부친상을 당하여 3년 상을 치르면서 원지정사에서 연구를 했다. 류성룡 선생님도 청백리 사상을 엿보이는 소박하고 단출한 건물이다. 원지 정사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옥연정사가 있는데, 옥연정사는 “임진왜란의 책임을 지고 낙향했을 때 여기서 ‘징비록’을 지필했다.”고 한다. 겸암정사는 류성룡의 형인 류운룡이 학문을 연구하던 장소인데, 겸암의 뜻은 겸손한 바위를 뜻하는데, 하천에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불어서 바위를 덮고, 비가 오지 않으면 자신을 드러내는 바위를 보면서 자신의 호를 겸손하게 지었다고 한다. 충효당은 류성룡의 종택이다. 충효당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충효당이라는 현판이 있다. 이 글씨는 당대 명필가 미수 허목이 전서로 쓴 것이다. 당호를 ‘충효당’으로 짓게 된 연유는 서애 류성룡이 임종할 당시 자손들에게 남긴 시구절인 ‘충과 효 외에는 달리 할 일은 없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류성룡은 자손들에게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간 것이다. 류성룡이 충과 효 정신을 중요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충효당 내에는 영모각이 별도로 건립되어 서애 선생의 저서와 유품이 전시되고 있으며, 바깥마당에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방문 기념식수가 있었다.

양진당은 입암고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류성룡의 형 겸암 류운룡의 종택이다. 사람들이 안채에 살고 있어서 사랑채와 앞마당만 둘러 봤는데 건물의 일부만 봤지만, ‘전체적인 건물을 다 둘러본다면 옛날에는 건물의 규모나 권세가 크고 대단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진당 내부에는 한석봉이 쓴 ‘양진당’이란 당호와 함께 현판이 걸려있다. 담연재는 탤런트 류시원의 부친 소유의 저택이다. 담연재의 진정한 가치와 명성은 담벼락 밖 돌구멍에서 나온다. 집 안에서 넣어둔 엽전이나 지폐를 길 가는 가난한 사람이 손을 넣어 집어가도록 만든 것이다. 구멍은 어른 주먹 하나가 겨우 들어가는 크기여서 욕심을 부려 많이 집으려 하면 손이 빠져나오지 못하게 돼 있다. 가난한 이웃을 배려하고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가슴이 따뜻해 졌다.

 

흙담 길을 따라 삼신당이 있는 골목길로 들어서자 마을 한 가운데 있는 삼신당에 이르렀다. 이 나무는 600여년 된 삼신 느티나무인데 마을사람들은 이 나무가 영험한 기운이 있는 신목으로 믿고 있다.  이 나무는 삼신당과 성황당 역할을 같이 하는 나무이다. 그래서 며느리가 아이를 낳으려 할 때 빌었던 삼신당이면서, 소원을 들어주는 성황당의 역할도 함께 하고 있어서, ‘소원을 들어주는 나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짚으로 꼰 새끼줄에 하얀 한지로 만든 소원을 적는 길쭉한 띠지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삼신 느티나무는 하회마을 사람들이 정월 대보름이면 마을의 안녕과 무병 그리고 풍년을 비는 동신제를 모시는 장소이기도 하다. 별신굿 탈놀이는 문제가 생겼을 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굿이다. 그래서 삼신 느티나무 아래에서 하회별신굿 탈놀이의 탈춤 판이 가장 먼저 시작된다고 한다.

 아침 7시에 출발하여 저녁 8시에 부천에 도착하였다. 긴 하루의 여정이었는데도, 사람들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가득했다. 차에서 내리면서 다음에 다시 꼭 초대해줄 것을 신신당부하고 너무 즐겁고 행복했다고 말씀해 주셨다. 아침 일찍 서둘러 준비하고 나오느라 아침을 거르고 왔을까 공정여행마다 새벽에 만든 뜨끈뜨끈한 떡을 준비하신 회장님의 세심한 마음, 그리고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으셔서 열강을 쏟아내시는  이종하 해설 선생님 그리고 뒤에서 앞에서 중간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잘 감당해 온 우리 콩시루 회원들 그리고 여행을 함께 동행 해 주신 비회원들 모두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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